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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Jan 5, 2014 17:59:25 GMT
Post by Admin on Jan 5, 2014 17:59:25 GMT
이곳에 외국생활에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일상의 단편들을 모아두고자 합니다. 새로운 경험이나 특별한 사건들을 기억하고 함께 나누고자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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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Jan 5, 2014 18:41:31 GMT
Post by Admin on Jan 5, 2014 18:41:31 GMT
얼음비, 연휴직전 GTA강타 정전복구 예상보다 지연 40여 만 가구 23일도 '깜깜'
광역토론토지역(GTA)의 많은 가정들이 '크리스마스 전의 악몽(Nightmare before Christmas)'을 겪고 있다.
지난 21일(토) 밤부터 내린 얼음비에 따른 대규모 정전사태로 인해 토론토 시내의 경우 23일(월) 오전 현재까지도 26만4천여 가구들이 추위에 떨고 있다. 요크, 듀람, 헐튼 등 '905' 지역에서도 약 20만 가구들이 정전을 겪고 있다.
토론토전력공사(토론토 하이드로)는 시내 일부 지역에 한해선 크리스마스 후에도 전력공급이 복구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23일 전했다.
하이드로의 앤서니 헤인스 CEO는 "당초 72시간 정도면 시내 전역에 한해 전력공급이 복구될 것으로 예측했으나, 이번 사태의 규모가 워낙 광범위해 그 안에 복구되지 못할 지역들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 토론토 이스트제네럴병원은 전력공급이 회복되면서 정상운영에 들어간 반면 서니브룩병원은 아직도 발전기를 통해 부분적 운영만 하고 있다. 토론토의 경우 한 때 30만 가구가 정전을 겪었다.
번, 리치몬드힐, 마캄 등 요크지역을 담당하는 전력공사인 파워스트림(Powerstream)은 전력이 끊긴 당초 9만2천여 가구들이 23일 오전 현재 4만8천여 가구로 줄었다고 전했다.
에이잭스, 보먼빌, 뉴캐슬 등 듀람지역에선 아직도 2만6천여 가구들이, 미시사가 등 필지역에선 540역 가구들이 계속 정전상태다. GTA를 제외한 남부온주 지역에서도 아직 11만4천여 가구들이 전기공급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다.
토론토대중교통위원회(TTC)는 이번 정전사태로 인해 셰퍼드 지하철노선과 스카보로RT의 운영이 당분간 중단됐고. 블루어-댄포스 지하철노선 중에도 우드바인과 워든역 사이의 지하철 서비스가 중단됐다고 전했다.
GO트랜싯의 경우 레이크쇼어 이스트 노선은 전력이 회복됐으나, 아직도 윗비와 오샤와역은 가동이 안 되고 있다. 반면에 비아(Via) 철도는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피어슨국제공항은 22일(일) 중 시카고, 뉴욕, 밴쿠버 등으로 향할 예정이었던 170여 항공기편을 취소했다. 공항당국은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미리 각자 항공사에 연락을 해볼 것을 당부하고 있다.
토론토공립교육청(TDSB)도 23일 중 300여 탁아시설을 포함한 모든 학교를 문 닫았다.
캐나다 한국일보 발행일 : 201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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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Jan 6, 2014 23:30:04 GMT
Post by Admin on Jan 6, 2014 23:30:04 GMT
격동의 2013, 캐나다 10 대 뉴스 기사입력 2013-12-31 (캐나다 중앙일보)
1. 부동산시장 상승 계속
국내 부동산시장의 가격은 ‘고공행진’으로 한 해를 보냈다. 캐나다부동산협회(CREA)의 12월 중간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말까지 국내주택평균가격은 지난해 대비 5.2% 상승한 약 38만 달러를 상회할 것으로 전망됐고, 주택매매수는 0.8% 증가세를 보이며 10년 평균치에는 다소 미치지 못하는 45만8천 채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됐다. 지역별로는 온주와 앨버타와 사스캐추완주를 포함한 서부지역에서 상승세가 두드러졌다.
토론토시의 경우 올 상반기의 부진을 털어내고 여름 이후 약진을 거듭했다. 주택시장 과열을 우려한 연방정부의 연이은 모기지 강화정책에도 모기지 이자율 상승을 우려한 주택구입자들이 여름철에 한꺼번에 주택시장에 몰리면서 가파른 가격상승을 견인했다.
콘도시장의 활황도 두드러졌다. 주택가격의 고공행진과 모기지 강화정책으로 인해 첫 주택구입자들이 주택을 구하기 어려워진데다 한 곳에서 주거와 직장을 선호하는 젊은 직장인들이 모이면서 콘도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토론토시의 12월 상반기의 평균주택가격은 52만 달러를 상회하고 있는 상황으로 주택별로 분석 시 독립주택과 반독립주택의 경우 각각 80만 달러와 63만 3천 달러를 상회해 거래되고 있다. 타운하우스와 콘도 또한 64만7천 달러와 36만5천 달러보다 높게 거래되고 있다.
2. 연방은행 수장 교체
전세계를 강타한 2008년의 금융위기를 안정된 정책으로 비껴간 마크 카니 연방은행(BOC)총재가 영국 (BOE)중은 수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바톤을 스테판 페레즈 신임총재가 물려받았다. 페레즈 총재는 취임 전부터 수출증대를 역설하며 경기회복에 따른 이자율인상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보였으나, 미국경기를 비롯, 글로벌경기가 예상보다 낮은 성장률을 보임에 따라 1%대의 초 저리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페레즈 총재는 나름대로의 자신의 정책을 서서히 펼쳐 나가는 중이다. 지난 3분기 이후 가파르게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캐나다환율은 중은의 연이은 침묵으로 인해 내년 상반기까지 하락세를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환율하락에 따라 제조업과 원자재 업종 등 수출업계는 파란 불이 켜지면서 내년도 경제성장을 견인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금융기관등은 내년도 국내경기가 2.3% – 2. 7%대의 성장율을 보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3. 저스틴 트루도 & 캐슬린 윈 부상
올해 자유당은 새로운 얼굴로 진용을 갖췄다. 지난달 4군데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서연방자유당은 의석구조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보수당과 신민당에 비해 지지도가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 같은 연방자유당의 인기가 상승한데는 젊은 지도자 저스틴 트루도의원의 인기몰이가 큰 영향을 미쳤다. 피에르 트루도 前수상의 아들인 저스틴 트루도의원은 외모와 부친의 명성에 힘입어 연방자유당 당수로 선출되면서 정치무대의 한복판에 들어섰고 지지율 하락을 보이고 있는 하퍼수상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주정부차원에서도 최초의 여성수장을 맞이한 자유당은 활발한 한 해를 보냈다. 온주가스플랜트 예산취소로 인해 물러난 달튼 맥퀸티 전 수상에 이어 바톤을 물려받은 캐슬린 윈 온주수상은 젊은층을 위한 일자리창출, 신규원전개발백지화, 독자적인 온주연금제도 시행 등 다양한 정책을 내놓았고, 특히 캐나다연금제도(CPP)를 대체할 온주의 독자적인 연금방안을 시도할 것이라고 천명, 연방정부와 팽팽한 대립 각을 세웠다. 24일 포럼리서치 여론조사에 따르면 온주자유당의 재집권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4. 퀘벡 열차탈선 참상
라크-메간틱시에서 발생한 열차가 탈선하면서 수송중이던 유조차량이 폭발, 47명의 주민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2013년은 라크–메간틱 시 사상 최악의 해로 기록될 것 같다. 지난 7월 6일에 발생한 열차탈선에 따른 수송중이던 위험물질이 폭발로 주민 47명이 사망하고 사고수습과 복구비용을 포함 총 5억 달러로 추산되는 인적ㆍ 물질적 피해를 입었다. 열차수송을 맡았던 미국계 열차회사 MMA는 사고수습과 복구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파산에 이르렀고, 그 비용부담이 시로 넘겨지면서 라크 – 메간틱시 주민들은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 라크 – 메간틱 열차사고 이후에도 열차탈선 사건이 재발되면서 국내 열차수송과 운영에 있어 전반적인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개선에 대한 논의가 불붙는 계기가 됐다.
5. 이민정책 갈수록 강화
난민의료축소 등 논란의 중심에 섰던 제이슨 케니 이민부장관이 고용개발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크리스 알렉산더 장관이 새로운 수장으로 부임했으나, 보수당의 강경한 이민정책은 유지되는 모습을 보였다.
올 한해 이민부는 시민권신청과 관련, ►언어요건강화되면서 비영어권 출신들의 부담이 높아졌고, ►시민권시험 난이도 역시 상향조정됐으며, 신청 후 시민권을 받기까지의 대기기간이 평균 3 년 정도로 연장됐다. 이와 함께 ►불법으로 시민권을 취득권을 획득한 이들에 대한 색출과 취소조치가 따랐으며, ►임시노동자를 고용하는 고용주들이 지켜야 할 규정을 한층 강화하는 등 일련의 이민관련 강경책을 내놓았다. 최근에는 ►탈북자들이 ‘대한민국국적을 자동취득’한다는 난민관련 지위를 강화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연방이민국은 이 같은 이민문호가 좁아지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캐나다정부는 전세계에서 가장 관대한 난민정책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지난해 어느 국가보다도 가장 난민들을 받아들였다”고 반박했다.
한편, 11월 1일 이민부는 2014년도의 이민자수에 대한 예상치를 발표했다. 총 24만 – 26만 5천명의 수준이 될 내년도 이민수준은 16만4천명의 경제이민, 6만8천명의 가족이민, 그리고 2만 8천명의 난민을 받아들일 것임을 공표했다.
6. 블랙베리의 쓸쓸한 퇴장
휴대폰의 명맥을 잇는 스타로 부상한 블랙베리로 상종가를 치던 캐나다의 대표적인 기술회사인 RIM사는 애플 아이폰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소비자들의 마음에서 점차 멀어지면서 회사의 존립 자체가 어려워지는 상황에 처했다. 2007년 주당 140달러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RIM사는 ‘블랙베리’로 개명하고 복귀를 위해 절차부심하고 있으나 3/4분기의 실적이 자산평가감소분을 포함, 27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하면서 2013년 12월 20일 현재 20분의 1에 해당하는 주당 7.74달러 수준까지 추락한 상황이다.
블랙베리는 폭스컨등과 5년 계약을 맺고 자구책을 펼치고 있으나 삼성-안드로이드, 애플 등 스마트폰이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 추세에서 회복이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존 첸 CEO는 “현재 블랙베리가 해결해야 할 당면이슈는 현재 휴대폰사업을 어떻게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모델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상황의 심각성을 전했다. 업계관계자는 RIM과 블랙베리의 추락에 대해 “시대와 소비자들의 변화하는 욕구를 제대로 읽지 못했고, 여기에 업계에서의 경쟁전략을 수립함에 있어 BBM과 관련한 경영진간의 불화로 인해 적절한 시점에 시장진입에 실패한 데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7. 토론토 홍수/정전
7월 8일 토론토시에 쏟아져 내린 초유의 폭우로 시내 곳곳의 단전과 침수사태가 발생했다. 126mm의 강우량을 기록한 이번 홍수로 인해 광역토론토 일대는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어둠의 도시로 변했다.
한달치와 맞먹는 폭우로 인한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 퇴근길의 신호등의 오작동으로 인해 퇴근길이 주차장으로 변해버렸고, 피어슨 국제공항도 일부 항공편의 노선 또한 취소됐다. 30만 가구가 정전됐고, 일부 지역의 경우 하루 만에 전기가 들어오는 등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침수규모가 컸다. 토론토 지하철역이 물에 잠기고 고트레인열차가 순식간에 물에 잠기면서 승객 1천 5백 여명 이상이 고립되는 위험천만한 일이 발생했다.
피해액 또한 온타리오주 사상 최대규모로 집계됐다. 광역토론토시의 홍수사태와 관련, 연방보험국은 피해보험금 지급액수가 약 8억 5천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고트랜짓은 이번 침수로 피해를 입은 고트랜짓 승객들에게 세탁비를 포함한 제비용에 대한 보상을 이례적으로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12월 21일에 내린 비가 얼면서 광역토론토시 전역의 전선시설을 강타, 일대의 25만가구에 공급되던 전력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날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한 이후 일부 지역은 복원됐으나 24일 현재까지도 노스욕, 쏜힐, 욕밀 지역주민들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겨울철의 한기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와 관련, 전력공급을 담당하고 있는 토론토 하이드로와 하이드로 원측은 전력공급재개를 위해 밤샘작업을 펼치고 있는 상태다. 전기안전국은 “얼음의 무게로 느슨해지거나 나무에 의해 쓰러진 전선줄은 감전위험 때문에 손으로 절대 만지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8. 새미야틴 사살 & 경찰과잉진압
지난 일에는 18세 고교생인 세미 야틴군이 토론토경찰로부터 총상을 입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빈 전동차에서 칼을 휘두르며 토론토경찰과 대치를 벌이던 고교생인 야틴군은 20명의 경관이 둘러싼 상황에서 제임스 포실리오 경관이 발포한 9발 중 8발의 총상을 온 몸에 입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이 과정을 한 토론토주민이 온라인으로 올림에 따라 알려지게 된 이 사건으로 토론토전역에서 야틴군에 대한 애도의 물결과 함께 토론토경찰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특히 G20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여론의 반감이 다시 점화되며 경찰의 총기사용규제에 대한 규제움직임도 높아졌다.
한편, 야틴군을 사살한 경관 포실리오 경관은 현재 야틴군의 총격과 관련 2급 살인죄로 기소돼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9. 앨버타 홍수
7월 9일 하늘이 뚫린 캘거리시에 하루에만 150mm이상의 비가 쏟아졌다. 오일샌드산업의 번창으로 국내 최고의 경기활성화를 견인하고 있는 앨버타주는 올 여름에 내린 폭우로 주 전체가 물에 잠기는 등 이번 여름은 주민들에게는 고통의 여름이 됐다. 집중호우로 캘거리 지대의 수십여채의 주택이 물에 잠겼고, 이에 따라 약 10만의 시민들이 임시대피소에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번 폭우로 인한 사망자수는 4명에 이르며 캐나다 보험국에 따르면 재산피해는 약 17억 달러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앨버타홍수로 인한 천문학적 보상비용으로 손해보험료 또한 올랐다. 업계관계자들은 이번 앨버타주 홍수로 인해 6월의 국내 GDP가 약 0.1%성장률이 낮아진 것으로 분석했다.
한편, 앨버타 주정부는 이번 사상최악의 홍수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총 10억 달러를 지불할 것으로 발표했다. 주정부는 적자를 무릅쓰고 지원금을 제공할 의사를 밝혔고, 이에 따라 각 개인에게 지급될 보상금의 수준은 약 1천250달러가 지급됐다. 연방정부도 앨버타주의 피해보상을 위해 약 5억 달러의 지원의사를 밝혔다.
환경론자들은 이번 캘거리와 토론토의 대형 홍수의 원인으로 지구온난화에 따른 예측불허의 날씨로 들고 이에 대한 전세계인의 시각의 변화를 촉구했다.
10. 랍포드 시장 사건
올 늦가을은 토론토시 주민들의 낮빛이 랍포드 토론토시장의 연이은 기행(奇行)으로 붉게 물들었다. 지난 월 포드시장의 코카인흡입이 장면이 담긴 비디오의 존재를 알린 언론보도에 대해 묵묵부답과 부인으로 일관하던 포드시장은 10월 빌 블레어 경찰총장이 비디오의 존재여부를 확인하자 마지못해 이를 시인하는 모습을 보이며 하루아침에 전세계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포드시장의 기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코카인흡입시인에 이어 포드시장이 욕설을 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가 공개됐고, 포드시장의 운전사가 기소됐으며, 마약과 관련해 포드시장을 조사하던 경찰이 포드시장의 부인폭행으로 인해 철수했던 사실 등이 추가로 밝혀지면서 그의 정치적 앞날은 중대한 고비를 맞게 됐다.
포드시장은 그를 바라보는 국제적으로도 여론의 조롱을 감내해야 했다. 미국의 풍자토크쇼의 단골메뉴가 되면서, 토론토시민들은 토론토시의 국제적인 브랜드에 타격이 가해졌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포드시장의 코카인흡입과 욕설파문이 알려진 후에 여론조사기관 입소스레이드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6%가 포드시장의 즉각적인 시장직에서의 퇴진을 요구한 것으로 집계됐다.
포드시장에 대한 여론이 들끓는 여론에 시의회가 조례(by-law)를 동원, 시장의 실질적인 권한의 대부분을 놈 켈리 부시장에게 위임하는 방안을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10월과 11월 2달간 포드시장이슈로 표류하던 시정은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고 포드시장은 토론토시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위치에 머무르게 됐다. 포드시장은 이 같은 일련의 민의의 표출에도 굴하지 않고 내년도 시장재선에 출마할 것임을 밝히고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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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Jan 12, 2014 2:44:52 GMT
Post by 바람소리 on Jan 12, 2014 2:44:52 GMT
캐나다 삶의 질, 의미 없는 상징 Stevenson, 함허
한국에서 사는 삶보다도 캐나다 생활이 질적으로 더 좋은가?
이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우리 삶의 질적 평가란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본래부터 인간 삶의 질은 주관적인 요소가 많다. 보편적 평가는 매년 여론조사기관에서 내놓는 삶의 질 평가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그 많은 평가요소 중에는 범죄율, 질서준수율(피부적 감각도), 자동차 문화, 의식주, 문화 및 여가 생활, 정신적 만족도, 미래관 등이 포함된다. 그 중에서도 캐나다는 기부 문화, 노약자 시설 및 보호 정책, 장애자 우대 문화, 다인종 간의 조화적인 삶 운영, 다가치의 공존 및 혼재, 은퇴 후 생활, 노동자 중심 가치, 엔지니어 등의 자연과학 중심 사회, 풍부한 천연자원과 생태자연 보호 발전, 여유 있는 정신 구조, 배려심 있는 인내심, 등의 제도적, 이성적으로 고안된 좋은 점이 많다. 이곳 삶에서 불안한 요소라면 경제 구조의 한계성, 치안활동, 외로움, 마약의 기회, 퀴어 섹스 접촉성, 이상한 종교 및 영혼 집단 존재 등의 약점이 있다.
대개 좋은 점은 익숙해지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 이상 더 나아질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점이 문제로 다가오면, 한번의 경험으로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 따라서 캐나다 사회에서 생활하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느낌을 많이 가질 것이다. (물론 단점보다 장점을 보는 식견을 더 많이 가지면 문제 없다.) 경찰이나 군인들을 우대하는 문화, 공무원이나 관료직들의 권위적 행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들의 완전히 차단된 듯한 인간관계에 지쳐가고, 성(섹스) 및 마약 등의 쾌락적 여가가 왜 파괴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가를 이해하게 되면서, 인생의 허탈감이나 부정적 요소가 한국의 편안한 살보다 더욱 더 크게 아픔을 느껴질 수도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적인 정신구조에서 집단적, 권위적 행태에도 금방 지칠 수도 있다. 더 근본적인 것은 한국 문화나 가치관에서 너무 차이나는 점에서 지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타인과 접촉하지 않으면서 캐나다의 장점만 누리고 산다면, 그나마 괜찮은 캐나다 삶의 질을 누리고 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개는 이곳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매일 허덕이며 지친 생계를 유지하다 보면, 캐나다 생활의 하위 존재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즉 타인에게 실제적 도움이 되기 보다는 거의 도움만 받는 존재성 임을 느끼게 된다. 어느 형태든지 국가의 제도적 혜택이나 연금, 복지제도에 얹혀사는 존재일 가능성이 많다. 이런 생존 형태의 삶 속에서 자기 삶이 만족스런 삶, 질 높은 삶이라고 내외적으로 공표하는 분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대개는 자기만족적으로, 변명과 꾸밈은 아니더라도, 하루하루를 잊고 살며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대개는 단조로운 삶 속에서 자신에게 가능한 쾌락적인 삶(다양한 형태의 오락, 골프, 스포츠 등)을 추구하기도 할 것이다.
이곳에서 삶의 질은 절대 물질적 삶으로 평가되진 않는다. 이미 어느 정도 먹고 살 바탕은 기본이기에, 삶의 질은 생계 이외의 인생 가치적 의미와 생활의 질을 말한다. 아직도 생계문제에 허덕이는 이민자들은 이미 삶의 질을 논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즉 질보다는 양적 문제에 묶이는 이민자는 이미 삶의 질이 상징적 존재로 되고 만다. 정신적 만족도나 내적 의미로 삶의 질을 측정하려면, 대다수 이민자의 생활은 편차가 심하다. 거의 현지 문화와 외부 접촉이 없고, 좋은 친우관계가 부족하고, 만족스런 사회활동이 부족하고, 자기 위치 확보가 약하고, 노년에 필요한 생의 가치가 현격히 떨어지는 경우에는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삶의 질이 좋다고 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삶의 형태 속에서 이민생활이 의미 없는 상징으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자기 삶의 질을 높이고자 이민 왔는데, 우스꽝스럽게도 삶의 질이 더욱 허덕이는 것 같은 텅 빈 상징성을 느끼게 된다. 이런 현상은 근본적으로 인생의 아이러니 성향이 된다. 보다 큰 것을 추구했는데, 결과는 예상과는 정반대의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생계에 허덕이며 일생을 살아온 듯한 허망한 생각이 지배하게 된다. 자기와 달리 자녀는 그나마 잘 성장하는 데에 비추어서, 자신의 인생이 더욱 허무해지기도 한다. 이런 이민의 꿈이 몰락되거나 자멸하게 될 때, 인생 최대의 아이러니를 맞게 된다. 이런 삶의 질에 대한 공허감은 인간 내성의 문제이기에, 쉽게 잊고서 물질에 묻혀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내면의 질적 가치와 생의 의미는 수비게 파악되지 않으므로, 이곳의 지성인들이 토해내는 실제적인 내적 현상을 기록한 캐나다 문학을 참조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3) 자연의 미
캐나다 자연은 황야와 숲, 호수와 록키산맥, 바다와 강으로 구성되어 있다. 록키 산맥의 밴프 호수나 뱅쿠버 섬의 정원, 바다 같은 호수의 옥빛 물결, 거친 대서양의 바다와 케이프, 로렌스 강변의 아름다운 섬들, 라브라도르의 거친 자연환경, 북극의 오로라, 거대한 대륙 속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구석을 하나씩 뒤지는 맛은 참으로 멋진 인생을 약속해준다. 이런 자연은 실제로 여행하며 즐겨야 맛이 난다.
그러나 자연의 향유는 먹고 사는 우선 순위에 밀려서 항상 늦어진다.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기 전까지는 그나마 즐기던 휴가나 쉼의 시간은 다급한 생계형 일에 밀려 항상 차연된다. 예술활동(그림, 사진, 글쓰기 등)을 하는 것도 아니면, 자연과 접할 기회도 시드렁 해진다. 인생의 급한 불을 먼저 끄다 보니, 어느 덧 내 머리에 하얀 파뿌리만 뒤집어 쓸 때까지 여행을 제대로 한번 해보는 분이 그리 많지 않다. 자연이라고는 내 정원의 잔디와 기후, 크릭의 산보길, 공원의 바비큐 놀이, 가끔씩 떠나는 주변의 자연 풍광 등이 고작 즐기는 코스로 고정된다. 축복 받은 분들은 은퇴 후에 쿠바, 뉴욕, 마이애미, 크루즈 여행을 떠날 여유라도 갖는다. 그러나 대개는 현재 촉박한 인생의 우선 순위에 항상 밀려서 여행 한번 제대로 가보지 못한다. 그래서 은퇴만 기다리는 슬픈 목아지의 노루가 된다.
이때 직접 접하지 않는 자연은 멀리 있는 달력 사진에 불과하다. 내 정원에서 모든 자연의 미를 즐길 수 있는데, 굳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있겠냐고 항변도 해본다. 그러나 좋은 직장을 가진 분들의 경우처럼, 일년에 한번 가는 몇 주간의 휴가로도 이 넓은 자연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다. 철따라 즐기는 자연의 맛은 전혀 없다. 그나마도 자연과 접하며 쉬며 여유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소일거리로 바쁘게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자연은 항상 내 시야 밖에서 존재하는 달력 속의 그림이 되며, 우편엽서 속의 사진이 되며, 내 기억 속에 잠자는 상징물이 되고 만다. 이런 현지 이민자 분들이 참 많다.
이때부터 캐나다의 자연은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한 선전물, 상징체가 될 뿐이다.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리움의 확대기를 통해 모든 것이 더 좋아 보인다. 그래서 상징물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모든 종교에서 성상물(聖像物, 아이콘)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름다운 캐나다의 자연이 죽은 십자가 같은 상징물이 되면, 과연 나는 아름다운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 머리 속의 상징에서만 살고 있는가? 이 아름다운 자연에서 멋지게 명상하며 자연을 음미하기보다는 단순히 스쳐가는 눈요기로 슬쩍 보고 마는데, 자연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래서 자연도 이민살이에 기쁨을 주지 못할 때에, 자연은 단순한 상징으로 다가오고 만다.
캐나다 자연이 아름답다고 이민을 설정하는 사람들은 특히 자연의 미학이 아이러니로 다가오지 않도록 더욱 정확한 준비를 해야 한다. 자연의 미가 의미 없는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면, 오히려 캐나다 자연을 즐기려고 이민을 계획했다는 넋두리가 더욱 의미 없는 상징의 헛 기침으로 다가오기 쉽다.
4) 캐나다 문화
캐나다가 즐겨 하던 것들이 무엇이었던가요? 영국 통치, 프랑스 문화, 그리고 미국 정보가아니었나요! 그런데 이렇게 변했네요:
영국 정보, 프랑스 통치, 그리고 미국 문화.
J. R. Colombo, “오, 캐나다”
혹시 우리나라 문화 풍토가 싫어서 이민 온 분이라면, 유교문화와 불교문화의 폐단을 많이 비판할 수도 있다. 유교적 형식과 불교적 사마니즘의 구조를 후진국가의 자태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특히 서양문화에 심취한 기독교적 정신구조를 가진 분이라면, 더욱 더 우리 문화와 서구 문화를 비교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문화든지 서로의 장단점을 갖고 있다. 이런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선호도는 개인차가 있고, 그런 기호도에 따라서 개인의 삶이 좌우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우리 문화와 캐나다 문화를 비교하지는 않겠다. 다만 캐나다 문화의 특징이 왜 상징적으로 되어서는 안 되는지만 살펴보자.
우선, 흔히 논의되듯이 캐나다 문화와 미국문화는 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또 두 문화는 같은 것인가, 아니면 상호 융합적인 것인가? 그렇다면 캐나다 문화는 미국문화의 부속물, 종속적 하위문화인가? TV, 라디오, 기타 매체, 예술활동 등의 전파매체 활동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 쉬운 예를 하나만 들어본다. 토론토에서 미국 버펄로 주의 방송과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캐나다 측의 해밀톤 방송국의 두 모습을 비교할 때마다, 캐나다의 열등한 방송 모습을 많이 본다. 문화는 강자가 약자를 흡수, 병합하기 쉽다. 이런 이치로 생각하면, 캐나다 문화는 미국적 문화로 변화, 종속화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캐나다 문화는 미국적 자본주의와 쇼 비즈 성향만으로 접근할 수 없는 광대한 기타 영토의 문화가 존재한다. 미국 문화 가청지역이나 영향력 범위는 미 국경선으로부터 200마일 이내의 남쪽 거주자로 한정할 수 있다. 이 좁은 지역(Strip)이 동서로 길게 띠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이 지역이 캐나다의 주요 도시가 형성되는 있는 접경지역이다. 캐나다의 거대한 영토(999만km정도) 중에서 이 좁은 남쪽 지대를 제외하고 미국문화에 지배되지 않는 곳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런 북극 지향적 문화가 캐나다의 새로운 문화이며, 이들이 자기들만의 긍지를 가지고 독립 자주화 시키려고 노력하는 문화가 바로 이런 곳에 존재할 것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부족의 인디안 문화, 이누이트 부족 이외의 원주민 문화, 퀘벡의 제 2의 프랑스 문화, 뉴펀들란드의 켈트 문화, 북극 문화 등이 순수 캐나다적인 요소로 발흥(發興)할 수도 있다.
캐나다 문화의 특징은 역시 자연과 인간간의 상호소통적인 문화성이다. 캐나다 문학비평가 Robert Frye는 캐나다 문화를 “요새 문화 정신garrison mentality”라고 정의하였다. 이는 자연을 방어 대상으로 하는 인간 중심의 문화성, 정신성을 대변한다. 광활한 자연 속에 요새처럼 부분 부분적으로 분리되어 독립한 작은 도시의 성격을 잘 반영해주는 말이다. 여기서부터 캐나다의 대표적 문학인 Margaret Atwood 가 주장하는 “가정 문화성Homestead culture”이 자연스레 형성된다. 거친 자연환경과 대적하면서 도피처로서의 가정에 파묻혀 살아가는 캐나다인을 연상하면 된다. 이렇게 거친 자연과 그 고통을 넘어서려는 인간 간의 상관관계로 표출되는 모든 문화성이 캐나다의 지리적, 국지적 특성이 될 것이다. 미국보다 북쪽에 위치한 캐나다 풍경이 현격히 달라지면서, 캐나다인의 마음과 문화도 달라진다.
이런 전통 캐나다 문화를 바탕으로 현대, 특히 21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대도시 중심의 이질적 문화와 전통 농촌 문화 가치가 서로 많이 비교된다. 토론토, 몬트리올, 뱅쿠버 같은 대도시에서는 미국의 이질적 첨단 문화, 삶의 변태성 등이 미국과 같은 수준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대다수 이민자들은 이런 도시에서 주로 거주하면서도 이들의 현대문화 현상을 거의 경험하지 않고 도심 속 오지에서 살아갈 확률이 높다. 이들의 예술 문화활동은 대도시적 변태성, 전위성, 파괴성이 넘친다. 이런 문화는 전통 캐나다의 문화가치와 사뭇 다른 형태로 다가오기에, 가끔씩 오래된 이민자들도 놀랄 경우가 많다.
이때, 캐나다 문화를 현대성으로 제대로 이해하거나 접촉도 못하면서, 새 문화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캐나다의 주류 문화가 단순히 자신에게는 의미 없는 상징에 불과한 고립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자괴감은 캐나다에서 조금이나마 문화적 향수를 접하려고 노력하는 분일수록 강하게 느낄 것이다. 현지 한국 문인이나 예술인들이 바로 이런 문화의 의미 없는 상징성의 직접적인 희생자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캐나다 문화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통 한국문화 활동을 계속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문화활동은 단순히 상징적 모습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즉 전문가적인 창조적 활동보다는 향수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과거지향적이며 자아만족적인 예술활동만 할 수 있다. 한국적 동호회 수준도 이루지 못한 체, 자기 취미라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축복받은 분들이다. 다만 그들이 그런 수준에서 자기 고개만 까닥거릴 때, 타자들의 의미 없는 상징성을 해결해줄 기미는 더욱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이곳 현지 문화 속의 한국 예술활동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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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인의 근본 아이러니
캐나다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방법이 독특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야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자기 스스로 캐나다 역사나 전통을 자랑하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지 못한다.
타인을 통해 자신을 볼 수있는 거울 논리가 바로 캐나다 정체성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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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다른 캐나다 문화는 역시 후생복지 제도와 전국민에게 적용되는 헬스케어 시스템에 있다. 또 법이나 국가 기관이나 권위에 대한 존경심이 남다르다. 캐나다인들은 자신의 문화가 눈의 문화, 하키 스포츠 문화, 록키 산맥 문화, 야생과 오염되지 않은 자연공간의 문화, 단풍나무 숲, 평화의 사도 정신 문화, 팀호튼의 도넛츠 생활 문화, 퀘벡의 분리 운동 정치 문화, 따스한 인디안 부족의 문화, 푸른 박공의 앤느(Anne of Green Gables)의 문화라고 자처한다.
캐나다 문화는 문화제품을 보고 구분할 수도 있다. 예전부터 캐나다 내에만 발견되는 문화품(조각, 건축물, 예술품 등)과 현재 캐나다 예술가들이 창조하는 문화품, 그리고 캐나다인들이 상상하고 투영해 내는 미래적 창조 문화성이 바로 물질적 또는 추상적인 문화제품이 될 수 있다. 어찌 보면 이미 묘사된 내용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상되는 내용이 더 큰 문화성을 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캐나다의 문화제품을 미국이나 유럽과 비교할 때는 규모나 양 면에서 비교할 것이 거의 없다. 특성과 남다름에서도 색다른 것이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캐나다의 문화제품은 자랑할 만한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서구문화는 직선적이다, 이지적이다, 사변적이다, 물질적이다, 행동적이다, 기계적이다, 단순하다, 도구적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묘사가 가능하겠지만, 우리의 정서적 문화와는 사뭇 다른 점이 많다. 이런 문화성은 같은 수준까지 따라가지 못하면, 먼산의 경치에 불과하다. 즉 우리나라 문화성과는 너무나 다르기에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정감주의, 단체주의, 무리성, 토장국 문화성이 높은데, 서구인들은 일단은 이성주의, 개인주의, 사생활, 패스트 후드 문화성이 강하다. 더구나 캐나다 문화는 미국의 인조적, 문화적, 예술적 문화보다는 다수가 아직 덜 가꿔진 순수한 자연 속의 투박한 문화다. 따라서 이들의 자연을 걷거나 경험하거나 직접 예술적 접촉을 하지 못하면, 캐나다의 본질적인 문화를 못 볼 수 있다. 이들의 화가(세븐 그룹 등)나 사진가, 작가들의 질박한 자연 풍경을 같이 동감할 수 있을 때, 캐나다의 진정한 문화를 공감할 수 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이런 문화를 즐길 수 있는가? 한국에서보다 더 황량하고 질박한 문화를 이겨낼 수 있는가? 그런 야생적, 후진적 즐거움을 향유할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있는가? 만약에 스스로 긍정적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이런 문화를 예술적으로나 피부적으로 즐길 기회를 더 찾아야 한다. 캐나다의 모든 문화, 삶, 또는 문화활동을 직접 참여하고 즐기지 못하면, 이런 황야 문화는 단순히 상징물로서 존재할 뿐이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절대 한국 이민자인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이곳의 현지 문화가 이민가는 나에게 별로 의미를 줄 수 없는 상징적 대상으로만 존재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된다.
지금까지 이민의 상징 가치로 설정한 교육, 삶의 질, 자연, 문화 등이 실제성과는 달리 상징물로만 존재하는 배경을 정리하였다. 또 그런 목적으로 이민 떠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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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Jan 13, 2014 1:47:27 GMT
Post by 세라부 on Jan 13, 2014 1:47:27 GMT
오늘 JCCC에 소속된 일본검도회에 등록을 하였다. 중년의 몸관리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무언가 운동을 해야되는데 실천을 못하고 있었다. 마침 대학교 검도서클 선배가 다시 love call을 해주어서 이번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잘 견디어 낼지 걱정이 앞선다. 나이들어서 노년까지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일주일에 4번 (월 수 금 일) 연습이 있는데, 우선 열심을 내어 일주일에 최소한 2번 정도는 훈련을 감당하는데 까지 서바이벌 하게 되기를 1차 목표로 삼으려고 한다. 대학시절 운동하던 날의 긴장 감이 다시 온다... 마침 올해부터 시작되는 동 일본 철도 동경구간 지하철 신호 개량 사업에 우리회사가 참가하게 되고 내가 시스템 안전 담당자로 내정되어 조만간 일본과 업무가 개시될 터인즉 이래저래 올해는 일본과 인연이 맺어지는 것 같다. 이참에 일본어도 배워 볼까 하는 마음이 든다. 몸과 정신의 수행능력이 예전 같지 않은데도 욕심내는 것 아닌가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한번 시도해 보고 싶다. 혹 기회가 되면 일본 무도관에서 벌어지는 검도시합도 구경해보고 눈 내리는 일본 산골에서 료칸에 들려 온천도 즐겨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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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Jan 16, 2014 1:56:40 GMT
Post by 세라부 on Jan 16, 2014 1:56:40 GMT
난생 처음으로 요가를 배웠다. 물론 초보코스이다. 그런데 이게 아주 쉽고 self massage 하는 것 같아 계속 할 것 같다. 내 생각에는 모든 동작이 않쓰는 근육을 쓰게해주고 몸 골고루를 스트레칭을 통해 풀어주는 것 같다. 그런 몇 가지 동작은 내가 따라하기 힘들었다. 아마도 내 근육이나 평형 감각이 취약한 부분인 것 같다. 이를 반복적으로 연습하면 약한 부분이 다시 회복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가장 취약한 부분은 복근과 학처럼 한발로 서는 평형자세이다. 훈련을 하면 뱃심과 학같은 고고함이 새로 생기려나.. 여하간 오늘 수면을 잘 취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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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Feb 9, 2014 8:25:16 GMT
Post by 검객 on Feb 9, 2014 8:25:16 GMT
"인터넷서 옮겨온 글"
20세기 일본 검도계의 검성(劍聖)으로 칭송받는 모치다세이치(持田盛二 Mochida Moriji 1885-1974)선생은 몸을 이용한 기본을 닦는데 50년이 걸렸고 나이 5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정한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고 토로하신 바가 있다. 나의 경우 53세에 검도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그것도 취미로 검도를 하는 동호인 수준의 검도를 시작한 것이다. 중년의 나이에 검도라는 무예을 접했기 때문에 나의 체력과 운동신경이 미치지 못하는 기술습득 보다는 오히려 연습동작이 내포한 개념이나 검리(劍理), 검도의 철학, 정신등에 관심이 컸다.
내가 생각하는 모범적인 검도인의 첫번째 자질은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어야 한다. 0.1초를 다투는 사생결단의 검도는 엄밀한 물리학적 원리에 검의 사용과 동작이 기초해 있다. 물리적 원리를 토대로 발전계승된 검도수련의 기본은 바른 검도를 습득하기위한 기초이자 고급검도의 골격을 이룬다. 대련의 승패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화려한 기술구사나 빠른 속도만을 추구하여 기본수련을 소홀히 하다보면 본인도 알지 못하게 자신의 검도가 차츰 퇴보하게된다. 많은 수련생들이 이와 같은 착오를 경험하고 다시 기본기를 충실히 수련하는 모습을 도장에서 적지 않게 보아왔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름길이나 쉬운 길을 찾는 것이 지능을 지닌 인간의 일반적 심리일 수 있지만 진정한 보람을 주는 성취는 땀을 흘려야만 얻을 수 있는 인고(忍苦)의 결과이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거목은 뿌리가 깊다는 비유는 확고한 기본적 토대의 엄정한 중요성을 강조한 교훈이다.
모범적 검도인의 두번째 자질은 정정당당함이다. 대련연습할 때 마다 사범님한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지적이다. 상대를 두려워함이 없이 바로 정대하여야만 공격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우월한 상대의 공격일지라도 그 격자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가르침! 이 단순한 가르침을 자각적으로 체험하기까지 나에겐 2년 반의 시간이 걸렸다.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귀중한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바로 대하지 못하면 바로 볼 수가 없다. 뿐만아니라 정대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있거나 바로 마주할 자신감이 없다면 외면과 회피를 초래하게 되고 결국 난국과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의욕을 잃게된다. 우리는 복잡한 생활속에서도 우회적 접근보다 단순한 정직이 얼마나 더 효율적인 삶의 길잡이인지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검도인의 세번째 자질은 나아가고 물러나는 때를 알아야 함에 있다. “움직임에는 때가 있고 머물기에는 낮은 곳이 좋으며 남과 어울림에는 어질어야 한다(動善時. 居善地. 與善仁.)”는 옛글이 있다. 이중 특히 동선시(動善時)는 용기, 거리, 기회의 예술인 검도에서 기회와 상응되는 가르침이다. 움직임에는 ‘때’가 있다는 뜻이며 치고 들어가야 할 때 들어가고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것이다. 지극히 단순한 말이지만 실상 나아가야 할지 물러서야 할지 그 진퇴(進退)를 바로 알 수 있는 심안(心眼)은 아무나 수월히 갖출 수 있는 덕목이 아니다. 우리 일상 생활주변을 살펴보자. 물러날 때 물러나지 못해 추잡한 불행으로 종결되는 인간드라마가 매일 같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또 나아갈 때 나아가지 못해 실패와 막대한 손실로 끝난는 파국은 얼마나 많은가. 과욕이나 두려움에 사로 잡히지 않은 마음의 평정이 있어야만 바른 진퇴의 선택이 가능하다. 이는 수양이 쌓인 인간의 마음만이 발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네번째 자질은 인내이다. 검도는 스스로를 이겨 나아가야 한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버티고 이겨 나가야 한다. 즉 상대를 이기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이길 수 있는 극기력이 있어야 끝이 없는 검도 수련의 길을 걸어 나아갈 수 있다. 모치다세이치 선생처럼 기본을 닦는데 50년을 바칠 수 없다면 많은 검도인이 신조로 하는 평생검도가 가능할까. 서두르지도 게으르지도 않은 소걸음으로 평생을 검도와 함께 하려면 화려한 기술보다 돌을 갈아 바늘을 만들려는 우둔한 인내가 필요하다.
평생검도(平生劍道) ………………………………… 50대에 검도를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은 60대가 되어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60대에 쉬지않고 검도를 수련한 사람은 누가 위로해 주지 않아도 당당하게 70대를 맞을 수 있다. 70대에 검도의 진미, 인간존중을 할 수 있으며 80대에 평온을 찾을 수 있다. (*2011년 1월호 잡지 “Woman Life”에서 발췌; 대한검도회 검도교실 선해재 이 은 미 관장)
어제 우리 시대 최고의 혁신적 기업인, IT의 Guru라고 하는 애플의 Steve Jobs가 영면하였다.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 심지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하고도 비견될 금세기 최고의 인물 중 한 사람을 잃었다고 대중들과 사회는 애도하고 있다. 그의 천재성도 암세포를 이기지 못해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것이다. 호사가적인 나의 호기심일까. Steve는 살아 생전 어떤 운동을 좋아했을까? 얼마나 자주 열정적으로 운동을 했을까? 그의 재산, 업적, 그가 좋아했던 가수, 노래, 여인들은 여기 저기 신문과 인터넷상에 나열되어 있지만 그가 어떤 스포츠를 즐겨했다는 기사는 단 한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천재이지만 그도 균형이 깨진 생활을 쫓기듯 살아왔음에 틀림이 없다. 인명은 재천이라 하지만 - 세상을 다 얻어도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안타까운 죽음을 그가 어제 맞이한 것이다. 새삼 건강은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중 첫번째 덕목이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검도를 하는 사람의 기본적 목표는 거의가 대동소이하다고 생각된다. 나 역시 무엇보다도 먼저 운동의 즐거움을 향유하고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검도를 수련한다. 더구나 나이의 제약이 없이 심성(心性)의 수련을 육체적으로 도모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운동이기때문에 검도를 좋아한다.
검도경지의 3단계 수파리(守破離)중 나아가고 물러남이 자유로운 ‘이(離)’의 경지에 이른 장자(莊子)의 포정(庖丁)처럼, 바른 칼을 쓰는 바른 마음을 지닌 건강한 백발의 늙은 검도인! 멋질 수 밖에 없는 이 모습이 검도에 대한 나의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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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Feb 9, 2014 9:05:57 GMT
Post by 검객 on Feb 9, 2014 9:05:57 GMT
검도는 단지 검만이 아닌 나의 마음을 다스리라 가르친다. 몸과 마음을 함께 다스려야 할 중년에 적당한 운동이다. 모델=오병철 4단(마포 제심관 관장) [신인섭 기자] 7년 전 검도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단순했다. 40대 초반이던 당시, 나이가 더 들어도 할 수 있는 운동이 없을까 찾아보게 되었다. 당시 나는 헬스클럽을 주 2~3회 다니고 있었는데, 러닝머신을 무작정 달리는 데 약간 싫증이 난 참이었다.
인터넷도 뒤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래서 압축된 것이 바로 골프와 검도였다. 골프에는 별 흥미가 없었던 터라 검도를 택했다. 집 근처 도장을 찾아가 등록하고 매일 새벽반(6~7시)을 나가기 시작했다. 저녁 약속이나 술자리가 잦은 직업 특성상 오후나 밤시간은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새벽운동을 해본 분은 아시겠지만, 이걸 지속하려면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나도 초단(2002년)을 따기까지는 개근상 받을 정도로 열심히 했는데, 함께 나오는 새벽반 멤버는 인원이 들쭉날쭉이었다. 그나마 나보다 나이 많은 분이나 엄마의 채근을 받는 중학생들의 출석률이 높은 편이었다. 50대 초반의 고참 P씨는 경기도 일산에서 사업을 하는 분인데, 이 분은 거의 운동을 빠지는 법이 없었다. 의사가 내장이나 신경 계통이 두루 안 좋다며 ‘종합병원’이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검도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건강 상태와 컨디션이 놀랄 만큼 좋아졌기 때문이다.
내가 다닌 곳은 대한검도회(www.kumdo.org) 소속 공인도장이다. 검도도 여러 유파가 있지만, 대한검도회가 가장 일반적이고 정통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입문 초기에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죽도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맨손을 위·아래로 휘두르고 발걸음 연습도 한다. 그 다음 죽도를 받더라도 3개월가량은 ‘지루한’ 머리·손목·허리치기를 반복한다. 맘 같아서는 상대와 겨루기(대련)를 하며 내 날카로운 칼맛을 보이고 싶은데. 그러나 더 수련을 해보면 기본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기본기가 허술한 탓에 더 이상 실력 향상이 안 되는 유단자도 허다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검도에 열중하면 누구나 손이나 발에 트러블이 생긴다. 죽도를 잡고 계속 휘두르니까 특히 왼손(오른손은 보조수단에 불과하다)에 못이 박히게 된다. 박힌 못은 몇 차례 까지는 과정을 거쳐 부드러운 굳은살로 정착한다. 발을 구르기 때문에 발바닥에 근저막염이 생기거나 종아리의 가자미 근육을 다칠 수도 있다. 나는 가자미 근육을 다쳐 한동안 한의원 신세를 졌다.
왜 검도인가. 검도는 매우 격렬한 운동이다. 많은 땀과 폐활량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정도라면 헬스나 자전거 타기와 별다를 게 없을 것이다. 나는 검도가 현재는 안전한 스포츠이지만, 과거에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무도, 까놓고 말해 ‘살인기술’이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사실 현대의 많은 스포츠가 고대의 전투 또는 사냥 기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양궁이 그렇고 각종 던지기 종목이 그렇다. 무도 종목은 말할 것도 없다. 도장의 선배 유단자한테 머리치기(죽도로 상대의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기술. 큰 머리치기와 작은 머리치기가 있다)를 할 때 왜 도끼질하듯 내려 찍지 않고 머리의 한 타점만 정확히 가격한 뒤 스쳐 지나가는지 설명을 들었다. “고대에는 상대의 머리뼈에 내 칼이 박힐 경우 상대가 순간적으로 휘두른 칼에 나도 같이 죽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다소 섬뜩하지만, 죽느냐 사느냐를 겨루던 고대 무사들을 상상하며 대련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또 하나는 마음자세를 매우 중시한다는 점이다. 검도 심사에 합격해 발급받은 초단 단증을 회사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꺼내 보인 적이 있다. 한 선배의 말. “어디 가도 그런 거 아예 보여주지 마라. 더 맞는다.” 사실 1년 이상 수련하면, 예를 들어 비가 오는 날 손에 긴 우산이 쥐어 있을 경우 “누구든 한 번 나와봐라” 하는 우쭐하는 마음이 생긴다. 바로 그런 마음이 검도에서는 금기다.
검도 용어 중에 ‘사계(四戒)’라는 것이 있다. 네 가지 경계할 마음이다. 경(驚·놀라는 것), 구(懼·두려워하는 것), 의(疑·의심 품는 것), 혹(惑·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대련 중에 상대가 기합을 크게 넣으면 초심자는 나도 모르게 놀라고 겁이 난다. 상대가 기술을 걸면 진짜 기술인지 속임수인지 판단이 안 서 우물쭈물하게 된다.
내가 순간적으로 앞으로 뛰어들어 머리치기를 할 때인데도 내 기술에 대한 의심과 혼란 때문에 저어하고, 결국 격자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용어 중 기본 중의 기본이 바로 ‘존심(存心)’이다. 어느 순간에도 방심하지 않는 마음자세를 말한다. 공격하기 전은 물론 공격이 성공한 뒤에도 존심을 발휘해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기검체(氣劍體) 일치’라는 말도 있다. 내 의지와 손에 든 검과 몸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검도는 운동을 시작할 때와 끝낼 때 항상 좌선을 한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힌다. 운동 자체는 매우 격렬하고 호승심이 작동한다. 때로 고단자가 내 죽도를 휘감아 멀리 던져버릴 때는 그야말로 ‘개처럼 달려가 물어오는’ 수모도 겪어야 한다. 중·고교생 유단자에게 두들겨 맞는 것쯤은 보통이다. 그런데도 검도는 재미있다. 그동안 검도 수련으로 몸과 마음을 다시 추스른 사람을 여럿 보았다. 나이 들면 나이 든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할 수 있는 운동이다. 새벽 공기 속에 두 손으로 죽도를 감아쥐고 상대를 노려볼 때, 그리고 운동 후 땀 범벅이 된 몸을 차가운 샤워기 물살에 내맡길 때 행복감을 느낀다.
직장인들께는, 다른 건 다 제쳐놓고 딱 한 가지 장점만 말하겠다. 바로 소리를 마음껏 지른다는 점이다. 검도장에서는 우렁찬 기합 소리가 필수 의무다. 요즘 우리나라 중년 남성들이 어디 마음껏 소리칠 장소라도 있는가. 그것만으로도 하루분 스트레스는 처리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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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Feb 9, 2014 9:11:52 GMT
Post by 검객 on Feb 9, 2014 9:11:52 GMT
검도의 시작은 禮義…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배운다
매주 금요일 고려대 검도장, 학생들과 OB들이 어울려 격투를 벌이는 도장엔 기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지금 나는 고대검우회의 부회장으로 각종 시합 때는 중년부 감독 겸 노장부 선수로 활동하며 인생의 가장 큰 낙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검도를 통해 고교, 대학의 검우들뿐 아니라 법원검우회, 성무회 등 대한검도회 산하의 각종 단체 선후배와 운동을 할 수 있으니 나에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검도는 흔히들 몸으로 닦고 마음으로 베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예의와 순리를 앞세우며 수련을 쌓을 수 있으니 그런 말이 나온 듯싶다.
내가 검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고등학생 때인 1972년이니 벌써 40년이 되었다. 지금은 공인 5단. 연륜과 내공이 쌓이며 언제부터인가 검도의 원리는 물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검도도 힘이나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중심을 지키며 상대의 허점을 눌러 나가는 순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또 물 속의 공기방울이 평형기의 수평을 잡아주듯 검도에 있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큰 산처럼 나를 지키고 흔들림이 없어야 하며, 검을 잡은 뒤에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해야 한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는 요소다.
고려대 검도장에서 죽도를 잡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이영재 변호사.
칼을 잡으면서 항상 마음 속에 두는 것은 예의다. 단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으면 자칫하는 순간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승패에 집착하다 보면 우리가 검도를 통하여 추구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검도인들은 항상 이를 경계한다. 상대와 부딪칠 때 그가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첫째요, 상대가 약하다고 얕보고 가격한 부위를 연거푸 타격하거나 계속 목을 찔러 들어가는 사도(邪道)를 삼가는 것이 두 번째 예의다.
화·금요일마다 1시간 내지 1시간 반 정도 대련을 하고 나면 두꺼운 도복 상의부터 하의 상단에 이르기까지 땀으로 흠뻑 젖는다. 죽도를 위로 들어 내려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동작이기에 검도를 하게 되면 평소 사용하지 않던 어깨 근육이 자연히 풀리고, 무거운 호면(머리를 보호하는 장비)을 착용하고 상대의 칼을 피하여 움직이다 보니 머리 속의 노폐물이 땀으로 다 배출되어 머리가 그렇게 개운해질 수가 없다.
50대 중반에 이르는 지금까지 주변에서 호소하는 오십견 증상을 느껴본 적이 없고, 그 흔한 감기조차 걸린 기억이 없다. 체력이 좋다고 주변에서 다들 부러워하는데 정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운동한 후에 마시는 시원한 생맥주 한잔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좋은 운동이라는 확신에 주변에 검도를 권한다. 검도는 관절을 많이 사용하거나 완력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기에 80세가 되어서도 대련이 가능한 유일한 격투기가 아닌가 싶다. 82세 된 검도 8단 선생님께서 젊은 선수 3명과 연이어 대련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감동이 아직도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가끔 검도계의 선배들은 활인검(活人劍)에 내포된 의미를 말씀하신다. 칼은 본래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만 이에서 더 나아가 사람을 살리는 수단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검도는 연장질(칼질)의 수단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칼날이 아닌 칼등으로 상대를 제압하여 상대로 하여금 그 뜻을 깨닫게 하는 정의의 칼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단전에 힘을 넣는다. 크게 칼을 들어 기합을 넣어 본다. 머리!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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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Feb 11, 2014 2:04:50 GMT
Post by 과객 on Feb 11, 2014 2:04:50 GMT
학문여역수부진즉퇴
예전에 중2한문 교과서에 나왔던 구절 같다.
공부하는 것은 흐르는 물에 거슬러 배를 젖는 것과 같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퇴행하게 된다는 뜻으로 기억한다.
비단 학교 공부만아니라 인생 살이 그자체가 그런 것 같다. 조금 쉴만하다 싶어 마음 놓고 있으면 어느새 물결이 몰아쳐온다.
더군다나 나와 아무런 민족적 공감대와 선후배의 교감이 없는 이민자 회사에선 조금만 틈을 보이면 금새 공격적이고 파고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앙생활도 거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은혜가 됬건 실천신앙이 됬건 지속적으로 붙잡지 않고 방심하고 있으면 저산에 흩어지는 한조각 구름 같다.
벌써 50을 넘긴지가 오래고 아직도 가야할 길이 아득한데.. 호흡을 가다듬고 게으름을 경계하고 부지런히 노력하자. 죽을 때까지 고3 아니 재수생....
흘러간 음악이 그리워지고 옛 동창들과 반주한잔 하고프지만 이것도 내가 감당 못할 사치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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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Mar 16, 2014 23:02:10 GMT
Post by serabu on Mar 16, 2014 23:02:10 GMT
북미 사우나 정보 o 서울 찜질방 (토론토) 드디어 토론토에 상륙한 찜질방 1호. 음식은 허가가 없어 못 팔지만 삶은 계란이나 식혜 등 간단한 간식 종류는 준비되어 있고 주변 식당에서 배달해서 먹는 것도 가능하다. 목욕 시설은 월풀과 샤워부스가 전부지만 찜질방은 여러 종류가 있고 개장한 지 얼마 안되어 시설도 좋은 편이다. - 주소: 328 Magnetic Dr. Toronto M3J 2C4 - 전화: 416-514-1965 - 요금: 성인 $25, 3세~12세 $13 - 시설: 게르마늄방, 황토방, 옥돌방,보석방, 맥반석방, 월풀 등 o Scandinave Spa Blue Mountain Address: 152 Grey Road 21, Blue Mountains Ontario L9Y 0K8 The award-winning Scandinave Spa™ Blue Mountain offers the renowned Scandinavian Baths experience. Situated in a natural forest, minutes from downtown Collingwood & Blue Mountain Resort and open all year from 10am-9pm, guests enjoy the serenity of the environment. The Baths include a Finnish Sauna, Eucalyptus Steam Room, Thermal & Nordic Waterfalls, Hot Baths, Cold Plunges & relaxation areas. Also available are Registered Massage treatments, relaxing getaway packages & an on-site bistro serving healthy local fare. Guests must be 19+ yrs. old. For more information visit the Scandinavian Spa website or call 705-443-8484. For a successful spa day, don't forget: Bathing suits are mandatory Sandals are recommended 2 towels, locker & key are provided Bath Access: 50 CAD, 40 CAD (Wendsday) We are open every day of the week; rain, shine or snow from 10 a.m. to 9 p.m. with massages starting at 9 a.m. o 킹사우나 (뉴저지) 한증막이 있어 뜨거운 맛(?)을 보고싶은 이들에게 어필한다. 입장료가 비싼 편이지만 할인쿠폰을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거나 인근 식당 등에서 얻을 수 있다. 특히 10세 미만 어린이는 입장불가여서 조용한 분위기에서 쉴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 - 주소: 321 Commercial Ave,Palisades Park, NJ 07650 - 전화: 201-947-9955 - 요금: $40 - 홈페이지: www.kingsaunausa.com- 영업시간: 오전 6시~ 밤 11시 - 시설: 불가마, 쑥찜질방, 한방사우나,천기토 토굴방, 소금방, 황금피라미드,한열소, 숯방, 발마사지실, 운동실,수면실, 이발소, 지압실, 남, 여 사우나,레스토랑 등 o 스파캐슬 (뉴욕) '인스파월드'라는 이름으로 개장했던 스파캐슬은 규모나 시설면에서 한국의 대형 찜질방에 뒤지지 않는다. 한국의 TV방송에서도 여러 번 소개될 정도로 유명세를 탄 스파캐슬의 가장 큰 특징은 찬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즐기는 대형 노천탕이라고 할 수 있다. 요금이 비싼 대신 시설이 다양해서 가족과 함께 하루를 즐길 수 있다. - 주소: 131-10 11Ave CollegePoint NY 11345 - 전화: 718-939-6300 - 요금: 평일 $35,주말 & 공휴일 $45, 생후 24개월 미만은 무료 - 홈페이지: www.nyspacastle.com- 영업시간: 오전6시~ 밤 12시 - 시설: 7종류 찝질방, 마사지샵, 쥬스바, 일식 & 양식, 노천탕, 아쿠아바, 한식당, 연회장, 피트니스, 남,여 사우나, 좌욕실, 부황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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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Oct 5, 2014 14:40:30 GMT
Post by Serabu on Oct 5, 2014 14:40:30 GMT
SPIEGEL ONLINE
10/02/2014 11:15 AM
The Merkel Effect
What Today's Germany Owes to Its Once-Communist East
By Dirk Kurbjuweit
East Germany ceased to exist following the 1989 revolution and the fall of the Berlin Wall. But did the former communist country help shape today's Germany? The answer is yes, and Chancellor Merkel is a big reason why.
The West will assimilate the East and transform the fruits of its revolution into profits for its companies. Nothing will remain of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GDR), and its citizens will have to submit to a foreign lifestyle. The East is taken over, an event the revolutionaries welcomed with open arms -- but it's a hostile takeover, an obliteration and eradication of what the eastern part of Germany once was. West Germany will simply expand, and that will be that.
Such were the expectations after the euphoria of the revolution -- the elation that prevailed when the Berlin Wall came down on November 9, 1989 -- had dissipated. Even worse, some even feared that a newly expanded Germany would regress into a reincarnation of a former empire of evil. In February 1990, author Günter Grass said: "The gruesome and unprecedented experience of Auschwitz, which we shared with the people of Europe, speaks against a unified Germany." Grass favored a confederation, and if it did turn into a unified state, after all, "it will be doomed to fail."
But Germany did not follow this advice. Unless we are completely mistaken, the failure predicted by Grass was avoided. But what about the other suspicions, the fears of takeover and commercialization of the revolution? Were the courageous citizens of East German cities like Leipzig and Halle merely added to the army of consumers, without bringing any political change to their new country?
A revolution has two goals: to put an end to everything that preceded it and to create something new. The revolutionaries of 1989 achieved the first goal when the GDR ceased to exist as a country. But the second goal was a different matter. The Federal Republic, as West Germany was (and today's Germany is) formally known, enveloped the former East Germany, and the new entity was something familiar, at least at first. The West had expanded eastward.
But now, 25 years after the fall of the Berlin Wall, it is clear that this is not the whole story. The revolution also created the conditions for something new, a different Germany. The institutions haven't changed and the West German economy continues to dominate, but something has also flowed in the opposite direction. Could it be that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which has been gazing westward since 1949, has become more eastern in the last few years?
Quieter in Germany
Nothing has contributed more to this change than the chancellor from the east, Angela Merkel. She is a democrat and a champion of freedom, and she hasn't created an expanded GDR. Nevertheless, there are aspects to the way she runs the country that are reminiscent of the former East Germany.
A dictatorship fears open discourse and conflict, and it thrives on the fiction of unity. The ruler or the ruling party claims that it is executing the will of the people, and because that will is supposed to be uniform, everyone is under forced consensus. Silence in the country is treated as approval. Merkel grew up in this system.
Elements of it are reflected in her political style. She despises open dispute, she does not initiate discourse and she feels comfortable when silence prevails. She prefers to govern within a grand coalition, because it enables her to create broad consensus within small groups. Things have become quieter in Germany.
Many people in the country like that. Eastern Germans are used to it. Even in the past, the Anglo-Saxon model, with its dualisms and heated conflicts, was suspect to most West Germans. Even the French argue more heatedly than the Germans. Merkel has enabled Germans to find themselves.
Merkel's center-right Christian Democratic Union (CDU) and the center-left Social Democratic Party (SPD) have been forged into a new kind of SED, a more social-democratic one, one which generously funds the social consensus, providing money for families and retirees, as well as a minimum wage. The only party that managed to show some sympathy for Anglo-Saxon capitalism, the Free Democratic Party (FDP), has all but disappeared.
While Merkel brings the East German element of silence instead of discourse into federal German politics, President Joachim Gauck, also an East German, provides an audible dissidence. As a pastor in the northeastern city of Rostock, Gauck was no resistance fighter, yet he was a civil rights activist. He injects his energetic approach to freedom into German politics, along with the message that freedom must be fought for or defended, with armed force, if necessary.
Germany's New Center
He has encountered the most resistance from a party whose roots are also in the GDR, the Left Party. For the most part, it emerged from the Party of Democratic Socialism (PDS), the successor party to the SED, and later joined forces with left-wing defectors from the SPD. The Left Party is so strong that a leftist majority could not be assembled without it. But so far the SPD has refused to entertain the idea of a coalition government with the Left Party at the national level. As a result, an eastern German party is responsible for the fact that an eastern German chancellor has managed to stay in power so long, at the head of a government with an eastern German imprint. It would, in short, be difficult to claim that Germany has retained the character of the old federal republic after the fall of the Berlin Wall.
This diagnosis depends heavily on Merkel and could therefore be ephemeral. But the nation itself has also changed. It has discovered a new center.
Until 1945, Germans had only lived in a shared country for 74 years. Perhaps that was why it was so easy for the western part of the nation to abandon the idea of unity. Konrad Adenauer (CDU), the first West German chancellor, believed that the Western powers represented the salvation of his federal republic. He didn't take the Stalin Note seriously, which held out the prospect of German unity for the price of neutrality in the early 1950s. As a result, the eastern Germans were left high and dry.
West Germany took the westward path, and by the 1970s, most people were using the concept of "brothers and sisters" in the two Germanys in an ironic sense. A sense of foreignness did exist, but it was also manufactured. Many West Germans wanted to see themselves as Europeans first and Germans second, primarily out of shame for the Nazi past. Many West Germans were fond of nonchalantly saying that they felt closer to a Briton or a Frenchman than to an East German.
Over the years, those on the more comfortable side of the Berlin Wall began to look askance at those on the other side. They were viewed as great athletes (who used performance-enhancing drugs, of course) who were nevertheless small-minded and smug, people who never drove faster than the speed limit on the autobahn, surrounded by informants, dressed in those oddly faded jeans, people with the misfortune to be locked up behind the death strip, and yet who were also there somewhat voluntarily. The West Germans created images of East Germans who were so foreign that it would be impossible to be reunited with them. In doing so, they overlooked the fact that varying levels of consumption and freedom have little effect on deeper-seated mentalities, and certainly cannot change everything in 40 years -- the blink of an eye, historically speaking.
'Social Monarchy'
The citizens of East Germany had not alienated themselves as strongly from their counterparts in West Germany, despite encouragement from the SED. The country bordering theirs to the west remained a place of aspirations and hopes -- for more freedom and a higher level of consumption. The step they took following their revolution was in fact not a step into a completely alien world. Despite the separation, citizens in the eastern and western parts of Germany retained a similar political mentality.
Germans value a strong social welfare state. In the GDR, it provided total care at a low level. While it isn't as comprehensive in the federal republic, it also offers a better standard of living.
Both the east and the west have a tendency toward anti-capitalism. It was an established part of the system in the GDR, while in West Germany it developed in a special form called the Rhenish model of capitalism, which was less permissive than the Anglo-Saxon model and allowed for more government influence.
The recently deceased historian Hans-Ulrich Wehler found that a desire for a "social monarchy" already existed in 19th-century Germany. Citizens pinned their hopes on a strong state and not the individual. This is the key difference between Germans, on the one hand, and the British and Americans, on the other.
Germans have a pacifist strain that developed on both sides of the border after the disaster of World War II. Especially active peace movements arose in both East and West Germany.
Despite their fascination with all things American, the Germans indulge in anti-Americanism. It was imposed by the state in the GDR, and yet citizens there knew that US missiles would destroy their country if a war erupted. In West Germany, the love-hate relationship with the American big brothers became mixed with anti-capitalist and pacifist elements.
It is interesting that these four basic positions -- the affection for the social welfare state, pacifism, anti-capitalism and anti-Americanism -- correspond to the aims of the Left Party, making it the quintessentially German party. Still, it cannot achieve majorities nationwide because it defends its position with a radical, un-German approach.
Deeper Roots
Nevertheless, Sahra Wagenknecht, a member of the German parliament and a Left Party leader, has managed to become a media star with her radical critique of capitalism. During the financial crisis, she gained the support of people who would otherwise have had little to do with the Left Party. Wagenknecht also represents a strong eastern element in German politics.
Of course, many East Germans had initial difficulties in dealing with the free market economy. And perhaps the food in their restaurants still isn't very good, at least judging by the complaints of West Berliners returning from weekend outings to the surrounding state of Brandenburg. But that will disappear over time. Fundamentally, eastern and western Germans are not that different.
In terms of mentality and values, East Germany would have had a much more difficult time uniting with Great Britain. But the same holds true of West Germany. At the time, West Germans felt closer to the British, and yet at their core they were as German as Germans can be.
Because anti-capitalism and the love of the social welfare state have even deeper roots in the eastern German population than in western Germany, these movements have become stronger overall in united Germany. Together, all four basic positions form an image of a nation that remains romantic and wants to keep its distance from the squabbles and hardships of a cold world. Merkel is the right chancellor for the job, because of her protective instincts, and because she usually does what her country expects her to do.
In its late phase, the revolution of 1989 was also a national revolution, just like the revolution of 1848, a time when citizens also associated notions of freedom and democracy with German unity. They failed because the Prussian king was unwilling to lead a democratic Germany. The proliferation of small states known as Kleinstaaterei lasted for another 20 years.
The revolutionaries of 1989 achieved their goal on October 3, 1990, which has been a national holiday ever since, the Day of German Unity. After that, the question was whether the fears of intellectuals like Günter Grass would come true, fears of a return to nationalism and militarism, and of German dominance over Europe.
Devoid of Nationalism
When it comes to nationalism, one of the things the West Germans managed to learn from the East Germans was flag-waving. It was part of every parade in the GDR, whereas West Germans only waved their flags in stadiums, during international sports competitions, and did so with some degree of reticence. The 2006 soccer World Cup, on the other hand, became a festival wrapped in the colors of the German flag, black, red and gold. The Germans celebrated as Germans, but they also celebrated Togo and Brazil. The act of waving the flag was not hollow the way it was in the past, but happy. We have become a nation almost devoid of nationalism.
There are pockets, of course. And deeply sick ones at that, such as the NSU terrorist group, which murdered immigrants. This excessive xenophobia emerged from the former East Germany as did the renaissance of the far-right National Democratic Party of Germany (NPD). But western Germany can't exactly claim to be overly welcoming to immigrants, either. In fact, mentalities in the east and the west were fundamentally similar on this issue.
On the issue of militarism, the peaceful 1989 revolutionaries would probably have been the last ones to predict that they would pave the way for Germany's participation in future wars. But that was exactly what happened. Once the Germans were united, their NATO allies saw them as a normal country, a nation with normal obligations. The expectations of military commitment grew and continue to grow, especially given the current state of global affairs.
The German military, the Bundeswehr, has thus far completed two major combat missions: in the Balkans and in Afghanistan. But regardless of one's stance on these missions, they have not triggered militarism or a new Prussianism. The Bundeswehr has remained a cautious army, one that lawmakers deploy in scrupulous ways.
Finally, when it comes to fears of German domination over Europe, probably the most breathtaking change has occurred in its position toward the European Union. Former Chancellor Helmut Kohl fought for the euro and a United States of Europe, and he felt that the Germans stood to benefit from every deutschmark that went to Brussels. West Germany did not see itself as a complete entity, which it wasn't, but as a part of larger entities, like Europe and NATO. It was because of this attitude that Kohl had no objection to the notion of allowing his country to dissolve into the EU.
Merkel learned policy in a united and therefore complete Germany, a large country that has become more self-confident. She pays closer attention to what is in Germany's interest, and in her view this doesn't always include solidarity with other nations, especially in financial matters.
A New Sensation
Germany dominates Europe because it is so strong economically. It is also highly self-reliant in other ways. It is no longer an obedient part of the West. When NATO launched air strikes in Libya, Merkel isolated her country from all the leading Western powers, including the United States, Great Britain and France. When Vladimir Putin took over the Kremlin, he discovered many sympathizers in Germany.
All things considered, a dialectic movement emerged from the revolution. The federal republic made Germany's eastern parts western by incorporating it, but it also became less western, perhaps even more eastern in the process -- because of its top politicians and their understanding of political culture, and because of a reinforcement of old tendencies like anti-capitalism and a love of the social welfare state.
"The Long Road West," the title of a book by historian Heinrich August Winkler, has been interrupted. In fact, we have even taken a few steps back recently. Germany is not as western European in 2014 as it was in 1989.
This isn't necessarily a bad thing, because the West itself is no longer as solid an entity as it was in 1989. As long as the underpinnings -- freedom, peacefulness, democracy, the constitutional state and the social market economy -- remain untouched, Germany also has a right to its own path within its alliances, the EU and NATO.
Perhaps the 1989 revolutionaries didn't have many of these developments in mind. But they didn't just remove the GDR from maps; they also changed Germany as a whole.
Revolutions arise from obstinacy. People are dissatisfied with what they are told and they develop new ideas. That was how it was in 1989, in Leipzig and elsewhere. Perhaps it's just a coincidence, but 25 years later we are now living in an obstinate country, which is a new sensation for Germans in the postwar era.
Translated from the German by Christopher Sul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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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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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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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by Daltongrice on Dec 10, 2021 21:51:08 G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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